바울과 실라의 그 다음 행선지는 데살로니가 였다. 데살로니가는 현재 그리스 영토이며 빌립보와 약 150km 떨어져 있는 곳이다. 바울은 도시와 도시를 이동할 때 마다 약 150km 걸어서 약 1주일이 걸리는 거리를 매번 이동했다. 앞서 말한대로 바울이 걸어서 이동했는지 또 다른 이동 수단이 있었는지는 성경에 정확히 기록하고 있지 않지만 도시의 이동이동마다 안식일을 맞이 한 기록을 봤을 때, 거리를 고려하면 걸어서 이동했을 가능성이 크다. 긴 여정동안 도적떼나 산 or 들짐승을 만나지 않고 무탈하게 이동하는 것도 하나님의 돌보심이라 생각된다.
바울은 데살로니가에 도착해서 회당에서 3주간 안식일마다 성경 말씀을 가지도 사람들과 토론을 했다. 앞서 16장 빌립보에서 전도할 때 회당에 들어가지 않고 회당 밖에서 전도한 기록을 보고 유대인들의 위협이 걱정되지 않았을까 생각했었는데 데살로니가에서의 바울의 행동을 보면 위협의 두려움은 없었는 듯 하다.
데살로니가에서 역시 유대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핍박했다. 그리고 바울이 전한 말을 약간 비틀어 당국자들과 군중들을 자극하여 소동하게 했다.
“그러나 그 사람들을 찾지 못하자 그들은 야손과 신자 몇 사람을 그 도시의 당국자들에게 끌고 가서 이렇게 말하였다. “세상을 온통 소란케 하던 사람들이 이 곳에도 왔는데 야손이 그들을 자기 집에 맞아들였습니다. 그들은 모두 황제를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17:6-7 KLB
바울은 황제를 거역하고 예수라는 다른 왕이 있다고 얘기한 적이 없고 예수님도 그렇게 얘기하시지 않으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었다고 했는데, 유대인들은 이를 비틀어 전파한 것이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에도 이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경우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단편적인 구절을 가지고 마치 예수님이 전하고자 하는 핵심내용이라고 가르치며 비판하는 행위. 2천년 전이지만 역사는 항상 반복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데살로니가 이후 바울과 실라는 도망치듯이 베뢰아로 갔다. 베뢰아에서 역시 유대인의 회당으로 갔으며 베뢰아의 사람들은 비교적 온건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아들였고 성경 공부를 했다.
“그래서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믿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그리스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않았다.” 사도행전 17:12 KLB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은 믿게 되었다고 하는데 이들이 유대인 회당에 있던 유대인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방인인 그리스의 귀부인, 남자들도 믿게 되는 성과를 이뤘다.
또 다시 데살로니가에 사는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소란을 피웠다. 이정도 되면 유대인이란 말만 들어도 지긋지긋하다. 어찌 성경을 잘 안다고 하는 유대인들이 예수님이 이땅에 오심을 전하는 사람들을 이리도 박해할까?
유대인들의 소동으로 인해 제자들은 바울을 바닷가로 보내 아테네로 가게 하였고 실라와 디모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디모데라? 앞서 16장에서 바울과 함께 하는지 아닌지 모호한 인물 아니었나? . https://pluspower.tistory.com/m/85
성경은 디모데가 베뢰아에서 바울과 함께 하고 있다고 성경은 기록하므로 그가 계속 바울과 함께 했음을 말하고 있더
“그래서 신자들이 바울을 즉시 내보내 바닷가로 가게 하였다. 그러나 실라와 디모데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안내하는 사람들은 바울을 아테네까지 데려다 주고 실라와 디모데도 속히 자기에게 오게 하라는 그의 지시를 받고 돌아갔다.” 사도행전 17:14-15 KLB
바울은 아테네에 도착하여 실라와 디모데를 기다리는 동안 도시의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았다. 그리고 회당에서 유대인과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날마다 사람들과 토론했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회당에서 유대인 및 경건한 이방인들과 토론하고 또 장터에 나가서 날마다 거기 모이는 사람들과 토론하였다.” 사도행전 17:17 KLB
우리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아테네는 당대 내놓으라는 철학자를 배출한 도시였다. 현시대의 TV토론을 보면 알겠지만 배경지식이 넓고 그것을 말로 잘 풀어내는 명석한 두뇌를 가진 사람과 토론하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조금의 논리적인 빈틈이 있으면 상대방은 그것을 물고 늘어져 토론 상대자가 아무 대답도 할 수 없게 만들어 보인다.
당시 아테네에는 당대 지식인들이 모두 모인 도시이며 이들과 종교적인 논쟁을 몇일 동안 토론한 바울이 얼마나 명석한 사람인지, 성경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아주 많이 알고 머리속에 잘 정리한 인물이 었음을 알 수 있다. 어떠한 질문과 공격에도 논리적으로 잘 설명할 수 있기 위해 치열하게 공부하고 고민하고 생각을 잘 정리했으리랴.
사도행전은 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그때 에피쿠로스 학파와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도 바울과 논쟁하자 어떤 사람은 “이 수다쟁이가 무슨 말을 하려는가?” 하였고 또 어떤 사람은 “외국 신들을 선전하는 사람 같다” 고도 하였다.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은 바울이 예수님과 그의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도행전 17:18 KLB
뭔가 TV토론에서 자주 보던 모습이지 않나? 논리가 막히거나 논쟁이 안될 때는 상대방을 인신공격 한다. 성경에서 아테네 철학자들은 토론 후 바울더러 “수다쟁이”, “외국신을 선전하는 사람”이라고 논리가 아닌 바울을 인신 공격하고 있다.
또 바울은 아레오바고 광장에서 연설을 했다.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아테네에서 사람이 많이 모이는 큰 광장이지 않을까 한다. 바울은 아레오바고에서 명설교를 이어 간다.
1) 아테네 시민들이 종교성이 많은 것 2) 여러분들이 모르고 모신 신이 바로 하나님이라는 것 3) 그분은 신전에 살지 않고 4)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라는 것 5) 우리는 그분의 자녀라는 것 6) 우린 하나님의 자녀이니 신을 단순한 형상 따위로 보면 안된다는 것 7) 하나님이 이제 모든 사람에 회개하라고 명령하셨으며, 8) 심판의 날이 온다는 것 9) 그리고 이를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는 것
이 연설을 들은 후 바울을 비웃는 사람도 있었으나 바울을 믿고 따르는 사람도 생겼다.
18장에서 바울은 고린도로 갔다. 고린도는 아테네에서 약 80km 떨어진 곳으로 그리 멀지는 않는 곳에 위치해 있다.
바울은 고린도에서 아굴라를 만났는데 아굴라는 천막을 만드는 사람이었으며 바울은 함께 천막을 만들며 아굴라와 함께 머물렀다고 한다. 정확히 이해가 되지 않아 킹제임스 영문버젼도 같이 읽어 봤는데, “And because he was of the same craft, he abode with them, and wrought: for by their occupation they were tentmakers.” Acts 18:3 KJV
바울과 아굴라가 the same craft 였다고 표현한다. 바울이 천막 만드는 일을 한적이 없었으므로 Craft를 비슷한 전공 또는 비슷한 기술즈음으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그리고 바울은 abode 라는 표현을 쓰며 아굴라와 함께 거주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그들의 직업은 천막을 치는 사람임을 기록하고 있다.
바울이 비슷한 일을 한적이 있나? 성경에는 바울이 기술 같은 것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아굴라의 집에 무전취식하기 미안해서인지 명석한 두뇌가 있었기에 일을 빨리 터득하여 그의 일을 도우면서 머문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고린도에서도 안식일마다 회당에서 유대인, 그리스인들과 토론하며 설득했다. 실라와 디모데도 고린도에 도착하자 바울은 말씀 전하는대만 힘썼다고 한다. 이를 비춰봤을 때 바울은 꽤 많은 시간을 말씀이 아닌 아굴라의 일을 돕는데 보낸 것으로 추측된다.
고린도의 유대인들도 바울을 계속 비난하자 바울은 또 다시 옷의 먼지를 털며 유대인들을 떠나버렸다.
“그러나 그들이 반대하고 욕설을 퍼붓자 바울은 옷의 먼지를 떨며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멸망을 당해도 그것은 당신들이 책임을 져야 할 일이며 나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소. 이제부터 나는 이방인에게로 가겠소.” 사도행전 18:6 KLB
바울은 하나님의 계시에 따라 년 6개월을 더 머물며 고린도에서 말씀을 가르쳤다.
“주님께서 어느 날 밤 환상 중에 바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 침묵을 지키지 말아라.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아무도 너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이 도시에는 내 백성이 많이 있다.” 사도행전 18:9-10 KLB
참 바울에게 힘이 되는 말이다. 두려워하지 말고 계속 말하라, 너를 지키겠다라니, 당시 바울도 사람인지라 긴 여정과 가는 곳곳 받는 핍박으로 상당히 지쳐 있지 않았을까 한다. 앞서 봤지만 바울도 불완전한 인간으로 때론 동역자들과 다투기도 하지 않는가? 한나님은 바울에게 환상으로 나타내어 바울이 오래 고린도에 머물며 전도하도록 인도했다.
그 후 바울은 아굴라와 그의 아내 브리스길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다. 재밌는 것은 바울은 서약한 일리 있어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고 한다.
“바울은 고린도에 좀더 머물다가 신자들과 작별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배를 타고 시리아로 떠났다. 그런데 바울은 출항하기에 앞서 전에 서약한 일로 겐그레아에서 머리를 깎았다.” 사도행전 18:18 KLB
어떤 의미일까, 겐그레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사도행전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는지 기록하고 있지는 않다.
바울은 에베소에 도착하여 유대인들과 또 토론했으며, 가이사랴에 상륙하여 예수살렘 교회를 방문하고 안디옥으로 다시 왔다.
바울은 안디옥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갈라디아와 브루기아 지방을 다니며 성도의 마음을 다 잡았다.
18장 말미 재미있는 일화를 기록하고 있다.
아볼로라는 유대인이 에베소에 왔는데 말 잘하는 성경박사로 말씀을 잘 알고 예수님에 대해 정확히 가르쳤으나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설교를 듣고 바울이 고린도에서 데려온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그 설교를 듣고 아볼로를 집에 데려다 더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한다.
아볼로는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었지만 핵심을 제대로 못 짚은 듯 하다. 아볼로도 성경을 설명하면서 분명 많이 알고 있는데 뭔가 마지막 퍼즐이 끼워지지 않았다고 느끼지 않았을까?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는 성경의 핵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볼로의 지식에 마지막 퍼즐을 맞춰주었고 아볼로는 그의 재능을 아가야에서 사용하여 많은 사람들이 믿게 만들었다고 한다.
우리 역시 성경에 대해 많이 알고 있더라도 핵심을 알고 있어야 아볼로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 신학 박사, 구약학 박사, 요한계시록 권위자 등과 같이 성경 곧곧 내용을 단편적으로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아굴라와 브리스길라와 같이 핵심을 정확히 아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사도행전 15장에서는 할례를 어떻게 받아들어야 할지 고민하는 바울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앞서 여러번 언급했지만 성경에는 지금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내용들을 이미 고민하고 결과를 기록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디테일하게. 사건의 발단은, 누군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아야 구원 받은 것이라고 신자를 가르쳤다.
“어떤 사람들이 유대에서 내려와 모세의 법대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신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사도행전 15:1 KLB
가르쳤다고 하는 것으로 봐선 이분이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거나 나름 성경에 대해 많은 지식이 있다고 인정 받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들이 가르친 것은 그들의 의견이 아니라 모세율법에 기록되어 있는 창세기 말씀이었기 때문에 더욱 설득력이 있었다.
“그러나 포피를 베어 할례를 받지 않는 남자는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는 자이므로 그는 자기 백성 가운데서 제거당할 것이다.” 창세기 17:14 KLB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아무말이나 듣고 설득당하지 않는다. 어떤 의견이던지 그럴사한 논리가 있다. 이들이 전하는 것은 구약을 근거로 했다. 모세 율법에는 할례를 받지 않으면 내 백성이 아니다라고 명백하게 쓰여져 있지 않는가? 하지만 이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단편적으로 보고 전한 것이다. 바울과 바나바는 이는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기쁜 소식과 달랐기 때문에 격하게 논쟁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의 잘 못된 논리가 전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바울과 바나바, 몇몇 신자들을 예수살렘으로 보냈다.
“이 문제로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과 심한 논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바울과 바나바와 다른 몇몇 신자들을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과 장로들에게 보내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였다.” 사도행전 15:2 KLB
그리고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반문한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여러분은 우리 조상이나 우리가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을 그들에게 지워 하나님을 시험하려고 하십니까?” 사도행전 15:10 KLB
할례는 율법을 대표하는 행위로 보면 위 말이 이해된다. 율법은 너무 우리의 삶을 지나치게 옥죄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우리조상들이 질 수 없었던 무거운 짐이라고하며, 왜 그것을 이방인에 지워 하나님과의 관계를 계속 시험하게 만드냐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논쟁을 사도행전은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꼭 필요한 것 몇 가지 외에는 여러분에게 아무 짐도 지우지 않으려는 것이 성령님의 뜻이며 우리의 결정입니다. 여러분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란을 멀리하십시오. 이런 몇 가지만 지키면 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사도행전 15:28-29 KLB
즉, 율법의 짐을 지지말라고 얘기하고 있으며 이를 하나님의 뜻이자 우리의 결정임을 강조하고 있다. 킹제임스 원문에는 짐을 지우지 말라는 표현을 No Greater Burden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는데, 이는 어떤 짐도 지우지 말라는 것을 강하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우상의 제물(meats offered to idols), 피와 목매어 죽인 것, 음란을 멀리하라고 기록하고 있다. “For it seemed good to the Holy Ghost, and to us, to lay upon you no greater burden than these necessary things; that ye abstain from meats offered to idols, and from blood, and from things strangled, and from fornication: from which if ye keep yourselves, ye shall do well. Fare ye well.” Acts 15:28-29 KJV 우상에게 바쳤던 음식, 음란을 멀리하라는 것은 이해가 되나,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왜 피하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피는 죄를 씻는데 사용되는 고귀한 것이라서 금지하는가? 목매어 죽은 짐승은 너무 고통스러우니까 짐승을 귀하게 여겨라는 의미인가? 성경에서는 왜 목매어 죽인 짐승, 피가 금지되는지 구체적인 이유는 기록되지 않는다 (아님 아직 공부가 부족해서 조금 더 성경을 면밀히 보다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15장 말미 바울의 2차 선교여행이 시작됨을 기록하고 있다.
2차 전도여행의 목적은 1차 선교여행이후 신자들이 가르침대로 잘 지내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며칠 후 바울이 바나바에게 “우리가 주님의 말씀을 전한 곳으로 다시 가서 신자들이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봅시다” 하고 말하였다.” 사도행전 15:36 KLB
여기서 바울은 그의 전도여행 동반자였던 바나바와 의견 차이로 바나바가 아닌 실라와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된다. 여기서도 성경의 디테일을 알 수 있다. 앞서 사도행전에서는 마가라는 요한은 1차 전도여행시 밤빌리아에서 안디옥으로 돌아갔다고만 기록되어 있었지만 당시 요한은 바울의 전도여행 방법과 목적지에 대해 상당히 불만이 많았는 것 같다. 사도행정은 요한이 바울일행을 버렸다고 표현하고 있다.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버리고 함께 전도하러 가지 않은 그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였다.” 사도행전 15:38 KLB
우리가 여행을 할 때도 작은 일에 일행간 논쟁이 오갈때가 있다. 바울이 하나님의 사역을 하는 사람이었지만 불완전한 인간이었고 인간과 인간간의 갈등을 성경은 모두 기록하고 있다. 바울도 역시 인간의 하나라는 것, 전도중 우리의 일상과 같이 여러 논쟁과 분쟁이 있었다는 것을 기록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바나바는 마가라는 요한과 시실리아로 떠났고, 바울은 실라와 시리아와 길리기아로 향했다.
16장부터는 2차 전도여행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번엔 키스로프로 간 것이 아니라 육로로 위로 이동했기 때문에 1차 전도여행의 마지막 행선지였던 더베에 먼저 도달했다.
더베, 루스드라로 이동하여 디모데라는 제자를 만났다. 디모데는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자들로 부터 존경받는 사람이었고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좋아했던 것 같다. 바울은 디모데를 데리고 다니려고 했으나, 디모데의 아버지가 그를 이미 할례를 행하여 데리고 다니지 못했다고 기록한다.
할례를 받았기 때문에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하지 못했다고? 뭔가 번역이 잘 못되지 않았나라는 생각이 들어 킹제임스 번역본을 같이 봤다.
“Him would Paul have to go forth with him; and took and circumcised him because of the Jews which were in those quarters: for they knew all that his father was a Greek.” Acts 16:3 KJV
킹제임스 원문에는 would have to 라는 표현으로 ~ 해야할 것이다 란 표현을 쓰고 직역을 하면 바울과 함께 여행해야하는 하는 디모데 이다. 바울과 함께 여행해야하는 디모데, 그의 아버지가 그리스인인 것을 아닌 유대인들 때문에 이미 할례를 받았다.
그럼 같이 갔다는 것인가? 같이 가지 않았다는 뜻인가?
성경는 정확히 기록하지 않았지만 17장에 바울이 베뢰아에 도착했을때 디모데가 함께한 것으로 봐선 함께 했다고 보는 것이 맞다.
조금 더 유추해보면 디모데의 아버지는 그리스인이었기 때문에 그리스인의 모습과 유사한 모습이었고 이는 사람들이 처음 디모데를 봤을 때 이방인이라고 오해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성경은 이러한 오해를 불식하고자 그가 유대인이고 할례를 받은 사람임을 기록하고 있다. 그 역시 유대인의 의식과 풍습을 따르던 사람인데 바울의 설교를 듣고 거듭난 사람이었다라는 걸 설명하고 싶지 않았을까?
처음 바울은 안디옥에서 터키 남부 지방으로 가려고 했던 것 같다. 하지만 성령이 아시아에 말씀이 전해지는 것을 막고 바울을 현재 이스탄불 남부 지역인 드로아로 향하게 했다.
바울은 마케도니아에서 기쁜 소식이 필요하다는 환상을 보고,
“그 날 밤 바울이 환상을 보았는데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서서 그에게 “마케도니아로 건너와 우리를 도와주십시오” 하고 간청하였다.” 사도행전 16:9 KLB
하나님이 주신 환상으로 판단하고 배를 타고 사모드라게도로 갔고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로 갔다. 빌립보는 현재 그리스 지방 Philipi라는 곳이며 최초로 유럽에 복음이 전해진 도시이므로 의미가 뜻 깊은 곳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빌립보는 로마의 식민지로 마케도니아를 가기 위한 경로에 있는 첫번째 도시였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빌립보는 사실 목적지를 가기 위한 경로 있는 도시였지만 바울은 빌립보에서도 기쁜소식을 전했다. 회당에 들어가는 것을 제지 당했는지, 아님 1차 전도 여행에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다가 유대인의 미움으로 목숨의 위협을 당했던 기억 때문인지 바울은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성밖 기도하는 사람들이 모일 법한 강가에서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했다.
“안식일에 우리는 유대인의 기도처가 있음직한 성문 밖 강가로 나가 거기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16:13 KLB
여기서 바울은 귀신들린 종을 보고 귀신을 쫓아 내었으나 종을 통해 돈을 벌던 주인들의 고발로 로마 관리들에게 끌려갔다. 바울과 실라는 심한 매질을 당한 후 감방에 가둬지게 되었다. 감방에서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찬송하자 큰 지진이 일어나 감방에 있던 죄수들이 모두 탈출하게 되었다. 감옥을 지키고 있던 간수는 졸고 있다 죄수들이 다 도망친 것을 보고 후에 있을 벌이 무서와 자살하려고 했으나 바울이 이를 말렸다.
간수는 등불을 구해 바울을 감옥 밖으로 안내했으며, 기적을 보았고 위기에 있는 자신을 따듯하게 대해준 바울이 고마워서인지 어떻게 구원을 받는지 바울에게 물었고 바울은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 예수를 믿으십시오. 그러면 당신과 온 집안이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고서 그들은 그 간수와 온 가족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려 주었다. 그는 바로 그 날 밤에 바울과 실라를 데려다가 매맞은 상처를 씻어 주고 온 집안 식구와 함께 즉시 세례를 받았다.” 사도행전 16:31-33 KLB
간수의 구원 과정은 이렇다. 기적을 봄 —> 말씀을 들음 —> 기쁜 소식을 깨닫음 —> 세례를 받음의 과정을 거쳤다. 신약에서 누군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꼭 말씀을 듣는 과정을 거친다는 것을 기억하자. 어떤 이유인지 행정관이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라고 했다. 아마 후에 바울과 실라가 로마사람이라는 것을 어디선가 듣지 않았나 싶다. 이에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로마 사람인 우리를 재판도 하지 않고 대중 앞에서 때리고 감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몰래 내보내겠다는 건가요? 그들이 직접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라고 하시오.” 사도행전 16:37 KLB
그러고 보면 바울은 애초에 빌립보에서 감옥에 가둬지거나 매질을 당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이 로마시민임을 당당히 밝힌 후 나오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 상황 속에서 하나님이 뜻하심이 있을 거라 믿었고 순종했으며, 간수와 간수의 가족을 구원하게 하는 열매를 맺게 되었다. 바울은 현명하고 언변이 좋았으며, 여러 나라 언어를 할 줄 알았고 거기다가 로마시민이었다. 그냥 그 자리에 있으면 이 세상 있는 동안 편히 살았을 텐데, 바울은 험난한 길인 하나님의 사도가 되는 길을 택했고 성경에 기록되어 2천년이 지금까지도 크리스챤들에게 존경받고 있다.
여기서 바울의 경로를 살펴 보면 기프러스, 터키 버가, 안디옥, 이고니온순으로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성경에는 육로에서 어떻게 이동했는지 나타나 있지는 않지만 터키 중앙지역에는 산맥이 있고 고산지대 있기 때문에 이동 자체도 쉽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안디옥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이고니온까지 구글맵에서 검색해보면 상당한 고도차가 있어보인다.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등산 수준이기 때문에 이동자체만으로 상당히 피로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14장에는 바울의 전도여행 모습을 기록하고 있다.
이고니온에서 안디옥과 매한가지로 유대인의 회당에 가서 설교를 했으며,
“이고니온에서도 바울과 바나바는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설교하였 다. 이 설교를 듣고 수많은 유대인들과 그리스 사람들이 믿었으나” 사도행전 14:1 KLB
안디옥과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이 바울의 전도를 방해했다. 이번엔 이방인을 선동하여 함께 바울을 피박했다. “믿지 않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에게 악한 마음을 품게 하였다.” 사도행전 14:2 KLB 이고니온에서도 소기의 성과는 있었다. 바울의 설교를 듣고 바울을 편드는 사람도 생겨 났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의 위협 때문에 루스드라와 더베와 근방으로 피했다.
루스드라에서 바울은 태어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을 만나 치료하는 기적을 보였다. 이 모습은 사람들에게 관심을 끌기 충분했고 루스들아 사람들은 바나바를 “제우스”라 부르고 바울은 주로 말을 하기 때문에 “헤르메스”라고 부르고 사도들에게 제사 지내려고 했다. 루스드라 사람들은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맞는 말로 설교했다.
““여러분, 왜 이러십니까?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이런 헛된 일을 버리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살아 계신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그래서 우리가 여러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4:15 KLB 안디옥, 이고니온에서는 구약 말씀을 인용하면서 유대인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지만 이방인에게는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믿어라라는 말을 먼저 꺼냈다. 바울은 때와 상황, 청중의 수준에 맞게 달리 말씀을 전했다.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바울을 배척한 유대인들은 루스드라까지 몰려왔다. 유대인들은 군중들을 설득해서 바울을 돌러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던졌으나, 바울은 일어나 다시 도시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때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유대인들이 몰려와 군중들을 선동하여 자기들 편에 끌어들여 바울을 돌로 쳐서 죽은 줄 알고 성 밖에 내다 버렸다. 그러나 신자들이 모여들어 그의 주변에 둘러섰을 때 바울은 일어나 성 안으로 들어갔으며 이튿날 그는 바나바와 함께 더베로 떠났다.” 사도행전 14:19-20 KLB
현대인의 성경 번역만으로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킹제임스 번역을 같이 찾아봤다.
“And there came thither certain Jews from Antioch and Iconium, who persuaded the people, and, having stoned Paul, drew him out of the city, supposing he had been dead. Howbeit, as the disciples stood round about him, he rose up, and came into the city: and the next day he departed with Barnabas to Derbe.” Acts 14:19-20 KJV
현대인의 번역과 킹제임스 번역간 큰 차이는 없어 보인다. 당시 상황에 뭔가 해프닝이 있었는 듯 하다. 상황을 정리해보면 루스드라 사람들이 바울의 기적을 보고 제사를 드리려고 하다가, 바울의 만류로 제사를 지내지 못 했다. 그때 유대인들이 바울이 돌로 쳐 죽은 줄 알고 성밖으로 내어 버렸다. drew out은 뭔가 뽑아내어 버리는 느낌이기 때문에 군중속의 바울을 뽑아내어 도시 밖으로 버린 듯하다. 근데 바울의 제자들이 둘러 서자, 그는 일어섰고 다시 도시로 들어 왔다.
유대인이 왔을 때 바울은 더 이상 피할 곳이 없어 죽은채 했을 것이고 바울이 죽은줄 알고 그의 시체를 유대인들이 성문 밖으로 버렸다고 이해하는 것이 합리적으로 보인다. 그만큼 전도가 쉽지 않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느끼면서 까지 바울이 말씀을 전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튿날 더베로 떠났다. 더베에서의 전도는 성공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많은 제자들 얻었고 다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을 거쳐 안디옥까지 돌아가게 된다. 루스드라와 이고니온, 안디옥까지 곳곳 바울을 배척하는 사람이 많았기에 피해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당시 산맥지방이 많은 터키 중부지역 특성상 루스드라, 이고니온은 지나갈 수 밖에 없는 경로에 있었는 듯 하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고난의 당위성을 설명하며,
“신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고 언제나 믿음에서 살라고 그들을 격려하며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한다” 고 하였다.” 사도행전 14:22 KLB
각 교회의 장로를 뽑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하나님께 장로들을 보호해달라고 주님께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 버가와 앗달리아를 거쳐 배를 타고 레바논 북부, 터키 동남부에 있는 안디옥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기서 처음 출발한 안디옥과 터기 중부에 있는 안디옥이 헷갈리면 안된다. 다시 돌아온 곳은 전도여행을 처음 출발한 안디옥이다.
안디옥에서 바울은 전도의 결과를 보고했으며 다시 오랫동안 안디옥에서 지냈다.
“그들은 교회 신자들을 모으고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행하신 모든 일과 이방인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 주신 것을 보고하고 신자들과 함께 거기서 오랫동안 지냈다.” 사도행전 14:27-28 KLB
앞선 장에서 이방인에게 복음 전파가 시작됨을 다뤘다면 지금부터는 본격적으로 이방인을 전도하는 얘기가 나온다.
사도행전 12장에는 베드로가 헤롯에게 잡혀 감옥에 간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헤롯은 베드로를 잡아 가두어 뒀다가 사람들의 이동이 적은 유월절이 끝난 후 베드로를 끌어낼 계획을 하고 있었다. “헤롯은 베드로를 유월절이 지난 후 사람들 앞에 끌어낼 생각으로 그를 잡아 가두고는 군인 열여섯 사람을 4인조로 나눠 지키게 하였다.” 사도행전 12:4 KLB 헤롯이 베드로를 사람들이 많이 모일 때 끌어 낸 것은 두가지로 정도로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는, 예수님을 전하면 이렇게 망신과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사람들 앞에 보여주고 싶어할 수도 있을 것이고 둘째, 자신이 직접 베드로에게 해악을 입혔을 때 혹시 하나님의 화를 입을까 심판을 군중들에게 맡기고자 했지 않을까 한다.
성경에 정확한 이유는 적어 놓지 않았지만 두번째 즉, 자신이 아닌 사람들 손으로 처리하게 하기 위함임일 가능성이 크다. 예수님이 돌아가셨을 때 본디오 빌라도도 제사장에게 심판하라고 미뤘으며, 스데반 집사가 죽을 때도 화난 군중들이 스데반 집사를 돌로 쳐 죽였다. 당시 지도층들이 상당히 명분을 중요시 여겼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모호한 부분은 군중을 자극하여 군중들이 직접 심판하게 하고 자기는 어떠한 선택을 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베드로가 천사에 의해 다시 풀려나고 (베드로는 항상 기적이 따라 다닌다) 단지 베드로를 감옥에 가두고 사람들에게 심판을 맡기려고 했던 헤롯은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않으므로 즉시 주님의 천사가 그를 치자 그는 벌레에 먹혀 죽고 말았다.”사도행전 12:23 KLB
헤롯이 무엇을 잘 못 했는가? 베드로를 단지 감옥에 가뒀을 뿐인데, 벌레에 먹혀 죽고마는 큰 벌을 받았다. 하나님은 인간이 생각하는 논리, 명분보다 사람의 마음을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저는 그럴 맘이 없었어요, 전 단지 사람들에게 결론을 맡기려고 했어요라고 헤롯은 하나님께 대변했을 수도 있으나, 헤롯의 마음은 베드로를 심판하여 전도하지 못하게 하려고 했음이랴. 얇팍한 명분, 논리로 우리의 생각을 더하여 어떤 행동에 대해 합리화하면 안되지 않을까, 이 구절을 보며 이런 생각이 든다. 그 후 베드로는 안디옥 교회가 보낸 헌금을 예루살램에 돌아가고 마가라는 요한을 데리고 다시 안디옥으로 돌아왔다.
13장 부터 바울의 전도여행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안디옥에는 바나바, 시므온, 루기오, 마나엔, 사울이라는 예언자와 교사들이 있었는데 하나님은 바나바와 사울을 특별히 세우셨다.
“그들이 주님을 섬기며 금식할 때 성령께서 “너희는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워 내가 그들에게 맡긴 일을 하게 하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그들은 금식하고 기도한 후 그 두 사람에게 안수하고 그들을 보냈다.” 사도행전 13:2-3 KLB 두 사람에게 안수할 때, 금식하고 기도한 후 안수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금식하고 기도한 후, 금식하며 기도했다는 의미이다. 성경에는 금식이라는 행위가 상당히 많이 기록되어 있다. 몸을 정결하게 하였다는 뜻인가? 잡념을 없애고자? 금식하면 음식 생각으로 잡념이 더 생기지 않나? 스스로 채찍질 하기 위함인가? 자신은 먹을 가치도 없는 낮은 존재임을 증빙하는 것인가? 이 부분은 조금 더 고민해야할 부분이다.
어쨌든, 모세부터 예수님, 바울까지 모두 중요한 기도를 할 때는 항상 금식을 함께 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사울과 바나바는 안수를 받은 후 키프러스로 가서 말씀을 전한다. 이때 베드로가 예루살램에서 데리고 온 마가라는 요한이 사울과 바나바의 일을 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키프러스는 사울 일행 외 세 사람이 더 등장한다. 1) 유대인 마술사이며 거짓 예언자인 바예수 (서기오 바울의 친구), 2) 섬 총독 서기오 바울, 3) 엘루마라고도 하는 마술사, 자세히 읽어 보면 엘루마 = 바예수가 동일 인물임을 알 수 있다.
“But Elymas the sorcerer (for so is his name by interpretation) withstood them, seeking to turn away the deputy from the faith.” Acts 13:8 KJV
Elymas라는 이름 자체가 주술사로 해석될 수 있음을 킹제임스 원문에는 괄호를 달아 설명하고 있으며, Bar-Jesus라는 본인의 이름에 Jesus가 붙는 것이 마땅하지 않아, 부르기도 싫어 그를 낮춰 명명하기 위해 Elymas라는 단어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한다.
여하튼, 엘루마는 서기오 바울이 사울의 말씀을 듣지 못하게 했으며, 주님께서는 엘루마를 소경으로 만드셨다. 사실 이때 엘루마가 영구적인 소경이 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성경에는 일시적으로 소경으로 만들었음이 기록되어 있다.
“이제 너는 주님의 벌을 받아 소경이 되어서 얼마 동안 햇빛을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자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었고 그는 이리저리 더듬으며 이끌어 줄 사람을 찾았다.” 사도행전 13:11 KLB
개역한글에도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는지 찾아보면 동일하게 얼마동안 소경이된다며 한시적인 벌임을 기록하고 있다.
“보라 이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으니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 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 하니 즉시 안개와 어두움이 그를 덮어 인도할 사람을 두루 구하는지라” 사도행전 13:11 KRV
하나님이 왜 한시적인 소경으로 만드셨을까? 나중에 쓰임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뭔가 이해가 되지 않아 킹제임스 영문번역도 찾아보았다.
“And now, behold, the hand of the Lord is upon thee, and thou shalt be blind, not seeing the sun for a season. And immediately there fell on him a mist and a darkness; and he went about seeking some to lead him by the hand.” Acts 13:11 KJV
영문버젼에서는 한 계절동안 해를 보지 못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얼마동안, 한 계절동안 모두 같은 말이다. 하나님은 왜 엘루마를 한시적으로만 벌하셨을까? 결론적으로는 사울의 기적과 친구의 소경된 모습을 보고 주님의 가르침에 대해 놀라 총독 서기오 바울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엘루마의 한시적 벌함을 조금 연계해서 생각해본다면 현명하고 구원받은 친구 서기오 바울이 근처에 있기 때문에 엘루마에게 한번더 전도의 기회를 주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하나님은 벌하시기 보다 한 생명이라도 구원하기를 원하신 것을 생각해봤을 때 합리적인 논리의 과정이지 않을까 한다.
그리고 여기서 중요한 것, 처음으로 사울이라는 이름 대신 바울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Then Saul, (who also is called Paul,) filled with the Holy Ghost, set his eyes on him,”Acts 13:9 KJV
전도여행이 시작할 때부터 사울은 바울이라는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예수님이 가르친 새술은 새부대에 채워야한다는 말씀처럼 과거의 자신의 모습이 묻어 있는 이름을 버리고, 하나님만 따르는 삶을 살기 위해 새 이름을 짓지 않았을까 한다.
키프러스를 떠나 바울과 일행은 배를 타고 밤빌리아의 버가로 이동했다. 버가에서 요한과 헤어지고 다시 비시디아의 안디옥으로 이동했다.
바울은 안디옥에서 기쁜소식을 있음을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한 회당에서 전하게 된다. 사람이 많이 모여 기쁜 소식을 전하기 좋았을 뿐더러, 성경에 대해 이해가 있고 율법을 지키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우선 말씀을 전하기 시작했다.
바울은, 기쁜소식을 전하기 전 서론 형식으로 구약에 대해 먼저 설명했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을 택하시고 그들이 이집트 땅에 머물러 있는 동안 그들을 큰 민족이 되게 하셨으며 큰 능력으로 그들을 거기서 인도해 내셨습니다.” 사도행전 13:17 KLB 구약을 설명하므로서 안식일을 기념하기 위해 모인 유대인들로 하여금 적대감을 완화시키킬 수 있을 것이다. 나도 여러분과 같이 구약을 믿고 하나님을 믿는다고..여러분들과 같은 이념을 가지고 있다고. 바울은 곳곳에서 구약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구약에서 예언된 사람임을 설명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이 우리 조상들에게 약속하신 기쁜 소식을 여러분에게 전합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으로써 그들의 후손인 우리에게 그 약속이 이루어지게 하셨습니다. 시편 둘째 편에도 예수님에 대하여 ‘너는 내 아들이다.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고 썩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내가 다윗에게 약속한 거룩하고 확실한 복을 너희에게 주겠다’ 라고 하신 말씀과 또 다른 시편에 ‘주의 거룩한 자를 썩지 않게 하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대로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13:32-35 KLB
바울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언변이 뛰어난 사람인 것으로 보인다. 대상이 유대이들이었기 때문에 구약을 인용하며 예수님이 예언된 분임을 설명하고 있다.
바울의 기쁜 소식을 듣고 유대인과 이방인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유대인은, 바울을 방해하고 모욕했으나, “유대인들은 군중들을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하는 것을 방해하며 모욕하였다.” 사도행전 13:45 KLB
이방인은 기쁜소식을 듣고 모두 주님 말씀을 찬양하고 믿었다고 했다. “주께서도 우리에게 ‘내가 너를 이방 민족의 빛이 되게 하여 온 세상에 구원을 베풀도록 하였다’ 라고 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이방인들은 기뻐하며 주의 말씀을 찬양하였고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된 사람은 모두 믿었다.” 사도행전 13:47-48 KLB
현대인의 번역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선택된 사람”이란 단어가 이해가 되지 않아 킹제임스 원문을 다시 찾아보았다.
“And when the Gentiles heard this, they were glad, and glorified the word of the Lord: and as many as were ordained to eternal life believed.” Acts 13:48 KJV
원문을 그대로 번역해보면, “이방인이 이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은 기뻐했고, 주님의 이름을 찬양했다. ;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으로 임명된 만큼”
이방인들은 영원한 생명을 믿는 것으로 인정된 만큼 하나님을 기뻐했다고 한다.
기쁜소식을 들을 때 말씀을 잘 받아 들일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겼던 유대인들은 바울을 모욕하고 비난했고 이방인들은 기뻐했다. 이러한 모습이 요즈음 우리 시대에도 똑같이 벌어지지 않는지는 고민해봐야 한다.
물론 기득권 (?) 세력에게 피박 받는다고 모두 바울의 모습을 적용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성경의 디테일함을 보면 우리가 고민하던 모습을 성경의 인물들이 이미 고민했으며, 우리가 겪고 있는 모습들을 성경에서 이미 비슷한 사례를 기록해둔 것을 봤을 때, 우리의 시대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곰곰히 생각해볼법 하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행동에 대해 바울의 행동안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바울과 바나바는 그들을 향해 발의 먼지를 떨어 버리고 이고니온으로 갔으며” 사도행전 13:51 KLB
그들을 향해 발의 먼지를 털었다고 떠났다고 한다. 킹제임스 원문을 보면
“But they shook off the dust of their feet against them, and came unto Iconium.” Acts 13:51 KJV
shook off 즉, shake off의 과거형으로 쓰여져 있다. 먼지를 탈탈 털어버리고 떠났다는 의미다. 이는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한 것으로 이해된다. “누구든지 너희를 영접하지도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마을을 떠날 때 신발에 묻은 먼지를 떨어 버려라.” 마태복음 10:14 KLB
바울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그대로 실행했으며 그것을 기록에 남겼다. 무서운 말이다. 이제 더이상 복음을 전하기 않겠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사도행전에서 고넬료는 아주 훌륭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하나님을 섬기고 가난한 유대인을 구하는 기도하는 사람, 로마 군대 장교 고넬료]
“그는 경건하여 온 가족과 함께 하나님을 두려운 마음으로 섬기고 가난한 유대인들을 많이 구제하며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다.” 사도행전 10:2 KLB
당시 로마군대의 장교라면 아주 높은 지위일 것이고 가이사랴라는 지역에서 큰 권력을 가졌을 것이다. 그가 하나님을 섬기게 된 것이 어떤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잘 못하면 자기가 가진 것들을 모두 내어 놓을수도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듯 하다.
“그는 천사를 바라보고 두려워서 “예, 주님, 무슨 일이십니까?” 하고 물었다. 그때 천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하나님께서 네 기도와 구제하는 일을 다 알고 기억하신다.” 사도행전 10:4 KLB
하나님은 천사까지 보내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모두 알고 계신다고 말씀할 정도로 고넬료는 의로운 사람이었다. 최고의 찬사다. 너가 하는 기도와 구제를 모두 알고 있다. 이보다 더 큰 칭찬이 있을까?
고넬료를 성경에서 왜 이렇게 극찬하고 하고 있을까? 당시 시대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사귀는 것은 율법으로 어긋난 행동이었다. 하나님은 이방인도 차별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고넬료를 등장시킨 것이다.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여러분도 아시겠지만 유대인이 이방인과 사귀거나 찾아가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어떤 사람이라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내게 보여 주셨습니다.” 사도행전 10:28 KLB
그렇다. 유대의 율법대로라면 기도와 구제를 앞장서고 유대인의 존경을 받는 고넬료가 이방인이라는 이유로 사귈 수가 없다. 하지만 하나님은 꿈을 통해 베드로에게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라고 명령하신다.
“그 안에는 온갖 네 발 짐승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과 공중의 새들이 들어 있었다. 그때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러나 베드로가 “주님, 그럴 수 없습니다. 저는 속되고 깨끗지 않은 것은 한 번도 먹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는 두 번째 음성이 들려왔다.” 사도행전 10:12-15 KLB
즉, 구원받은 의롭다고 인정받은 이방인들은 이미 깨끗해졌으니 사귀고 가까이하라는 의미로 볼 수 있으며, 구원받은 고넬료는 이방인이지만 함께 교제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베드로가 자기가 본 예수님에 대해 설명하자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렸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도 성령을 받는 모습을 보고 놀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아직 베드로가 이 말을 하고 있을 때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베드로와 함께 온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시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사도행전 10:44-45 KLB
킹제임스 성경 원문을 조금 살펴보면
“While Peter yet spake these words, the Holy Ghost fell on all them which heard the word. And they of the circumcision which believed were astonished, as many as came with Peter, because that on the Gentiles also was poured out the gift of the Holy Ghost.” Acts 10:44-45 KJV
이 말을 하는 동안 이 말을 듣는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렸다고 한다. 그리고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 뿐만아니라 할례를 믿는 사람들 즉 유대인들도 놀랐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할례 받은 사람들만 성령의 선물을 받는 다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깨끗함이 인정받은 거듭난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린 것이다. 이는 율법의 행위가 구원의 핵심이 아님을 말하는 중요한 사건이다.
11장에서 베드로는 고넬료와 있었던 이야기를 예루살렘에 전한다. 예수살렘의 사도들과 신자들은 이방인이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는 것에 많이 놀랐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베드로에게 묻는다.
“당신은 할례받지 않은 이방인들의 집에 가서 그들과 함께 음식까지 먹었다면서요?” 하고 따졌다.” 사도행전 11:3 KLB
사도들도 할례를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 말씀을 통해 거듭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예수님의 말씀과 전도, 예수님 승천 후 이 사건까지 사도들은 유대인들 만 대상으로 전도를 했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이 말을 듣고 의심이 풀어져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그렇다면 하나님이 이방인들에게도 생명에 이르는 회개의 기회를 주신 것이 아닌가!” 하였다.” 사도행전 11:18 KLB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이방인도 거듭날 수 있음을 이제서야 깨닫게 된다. 사도행전의 앞장들을 읽어 보면 신약에서의 말씀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 하다.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실때 분명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라고 했지만,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 마태복음 28:19-20 KLB
제자들은 율법의 행위로 정결함을 인정받은 유대인들에게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도들은 성실하고 예수님과 깊은 신뢰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예수님이 하신 가르침들을 잘 정리하는 과정이 부족했지 않았나 싶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있었지만 실제 행동은 그들이 예전부터 해오던 대로 행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불완전한 존재라는 것이 느껴진다. 우리와 똑같은 불완전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은 이런 불완전한 사람들도 예수님의 제자로 쓰셨다는 것에 작은 위로를 얻는다. 불완전하고 아주 명석하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나름 용처를 가지고 쓰신다는 것을 잊으면 안된다.
사도행전 내내 유대인들에만 말씀을 전했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으며,
“스데반의 일로 생긴 박해 때문에 흩어진 신자들이 페니키아와 키프러스와 안디옥까지 가서 유대인들에게만 말씀을 전하였다.” 사도행전 11:19 KLB
고넬료를 기점으로 이방인에게도 말씀을 전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몇 사람은 키프러스와 구레네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이 안디옥에 가서 그리스 사람들에게도 주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전파하였다.” 사도행전 11:20 KLB
성경상 순서는 고넬료 이후 부터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했지만 시점상 안디옥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미 이방인에게도 말씀을 전했던 것으로 보인다. 초기 안디옥 교회는 아주 이상적이었을 것 같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일찍이 깨닫아 이방인들에게도 말씀을 전하고 구원받게 했으며,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또한, 유대의 흉년 때에는 형제들을 돕기 위해 헌금을 모아 나누기도 했으며 마치 규모있고 재정이 넉넉한 교회가 시골의 작은 교회를 돕는 모습을 2000년 전에 벌써 본 듯 하다.
사울은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찬성한 사람이었고 믿는 사람을 박해하는 사람이었다. 스데반이 죽임을 당하던 날 현장에서 있던 사람이었고, 돌로 친 거짓 증인들의 옷을 맡아준 사람이기도 했다.
사울에 대해 간단히 언급 후 빌립이라는 집사가 나온다. 빌립 역시 기적을 중심으로 말씀을 전하였다.
“군중들은 빌립이 하는 말을 듣고 그가 행하는 기적을 보면서 하나같이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사도행전 8:6 KLB
사도들에 의해 안수된 집사들은 이렇게 기적이 중심이었다. 당시 상황은 로마에 의해 핍박받던 시대이자 자기가 구원자라고 주장하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예수님 때문에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상당히 혼란스러웠을 것 것이다. 수 천년 동안 지켜온 유대교와 다른 다른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기적이라는 신비함이 있어야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이지 않았을까? 빌립에 의해 사마리아에 믿는 사람이 많아 졌다는 얘기를 듣고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왔다.
“이것은 아직 그들에게 성령이 내리지 않았고 그들은 단지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두 사도가 그들에게 손을 얹자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 사도행전 8:16-17 KLB
사마리아 사람들은 세례만 받았고 성령을 받지 않았다. 당시 성령은 사도들만 줄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령을 줬다는 것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아 킹제임스 성경 원문을 찾아봤다.
“(for as yet he was fallen upon none of them: only they were baptized in the name of the Lord Jesus.) Then laid they their hands on them, and they received the Holy Ghost.” Acts 8:16-17 KJV
그들 중 한사람도 쓰러지지 않았다. 오직 주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았다. 여기서 They는 사마리아인이고, He도 사마리아인의 다수 형태인다. 세례만 받고 성령은 받지 않았다는 말은 번역본과 동일하나 정확한 의미가 이해되진 않는다. 확실한 팩트는 당시 집사들은 세례는 줄 수 있어도 성령은 사도들 통해서만 줄 수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럼 성령은 무엇인가? Holy Ghost는 무엇을 의미하며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 것인가? 공부가 더 필요한 구절이다.
성령을 주는 사도들의 모습을 보고 시몬이라는 사람은 돈으로 살 수 없냐고 묻는다. 이런 구절을 보면 성경은 아주 디테일하다란 생각을 한다. 시몬은 애초 잡기로 신비로운 행위를 하던 사람이었으나 빌립을 통해 세례를 받은 사람이다. 하지만 예전 행위의 기억을 버리지 못해 자연스럽게 물어봤을 것이다.
“얼마면 기술 배울 수 있을까요?”
시몬은 사도의 행위가 어떤 마술의 기술이라고 생각했으며 배우고 싶다 얼마면 가르쳐 줄까란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한다. 요즈음 세상에서 사람들간 충분히 오갈 수 있는 대화 형태이며 옛날 사람들이나 지금 사람들이나 의식의 흐름은 크게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사마리아의 전도 이 후 빌립은 주님의 뜻에 따라 예루살램으로 가게된다. 이때 가는 길에 계획하지 않았지만 성경을 읽고 있는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재정을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 하나님 말씀을 전하고 세례를 주었다.
에디오피아 사람은 복받은 사람이다. 사도들을 찾으러 간것도 아니고 만나려고 노력한 것도 아니지만 성경을 읽고 있을 때 빌립이 나타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세례까지 받게 되었다. 우리는 언제 어떻게 기회가 올지 모른다. 찾지 않아도 기회가 올 수 도 있다. 기회를 위해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된다는 구루의 말들이 성경에도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그 고관이 빌립에게 “이 말은 이사야 자신을 두고 한 말입니까, 아니면 다른 사람을 두고 한 말입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빌립은 그 성경 말씀에서부터 시작하여 예수님에 대한 기쁜 소식을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사도행전 8:34-35 KLB
그리고 기회가 왔을 때 에디오피아 고관은 기회를 잡았다.
9장 부터는 사도바울의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사울은 믿음의 사람들을 죽일 기세로 공문을 가지고 다마스커스로 이동하고 있었다. 중요하기도 했지만 다마스커스 회당들으 공문에 순순히 따르지 않을거라 생각했는지 직접 공문을 들고 이동했다.
이때 하나님은 사울 앞에 나타나셔서 그의 눈을 멀게 하고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시내까지 가게 하였다.
“사울이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같이 가던 사람들의 손에 이끌려 다마스커스로 들어가서” 사도행전 9:8 KLB
하나님은 사울을 선택한 사람이라 설명하였고 아나니아로 하여금 사울에게 가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나 주님은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그는 내 이름을 이방인들과 왕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널리 전하도록 내가 선택한 사람이다. 그가 나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인가를 내가 그에게 보이겠다.” 사도행전 9:15-16 KLB
하나님은 사울이 하나님을 위해 얼마나 많은 고난을 받아야 하는지 보여주겠다고 했다. 영어원문을 조금 찾아보면
“But the Lord said unto him, Go thy way: for he is a chosen vessel unto me, to bear my name before the Gentiles, and kings, and the children of Israel: for I will shew him how great things he must suffer for my name's sake.” Acts 9:15-16 KJV
사울을 Chosen Vessel이라고 표현한다. a chosen person? 이나 a chosen one이라는 단어를 안쓰고 Vessel 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앞으로 사울이 기독교 신약역사에 큰영향을 미칠 것을 알고 있다면 Vessel이라는 표현이 얼마나 적절한 표현인지 알 수 있다. 그렇다. Vessel은 큰 그릇을 의미한다. 아주 큰 그릇. 하나님을 위해 선택된 아주 큰 그릇. 그리고 이방인, 왕, 이스라엘의 사람들 앞에 하나님의 이름을 그릇에 새기겠다고 한다. 사울이라는 그릇에 하나님의 이름을 새긴다. 그리고 하나님 이름의 sake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아야만 하는지, must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반드시 고통받을 수 밖에 없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나니아에게 사울을 인도하도록 명령했으며 사도는 아나니아의 기도로 다시 눈을 뜨게 되었다.
“그러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떨어져 나가고 그는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어나 세례를 받은 후 음식을 먹고 힘을 얻었다. 사울은 며칠 동안 다마스커스에 있는 신자들과 함께 지냈다. 그러고서 그는 곧 여러 회당으로 가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외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9:18-20 KLB
그리고 사도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여기서도 사울의 변화 과정을 보면, 고난 —> 기적 —> 세례 —> 교제 or 말씀 —> 확증의 단계를 거친듯 하다. 신약에서 믿는 사람을 거듭난 과정과 살짝 다르다. 앞서 거듭난 사람들은 고난 —> 기적 —> 확증—> 세례의 단계를 거쳤다면 사울은 세례 이후 교제 or 말씀의 과정을 거친 후 거듭난 과정을 거친 것으로 보인다. 사울은 기적이 본인에게 일어났으나 뭔가 긴가민가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적을 경험한 후 신기하고 감사한 마음에 세례를 받았으나 하나님이나 예수님에 대해 제대로 알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세례 이후 한동한 신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말씀과 교제로 신앙을 정비한 후 어떤 깨닫음을 통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외치기 시작했다. 사울의 정확한 심경 변화는 성경에 나타나지 않으나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을까 충분히 유추해볼 수 있다.
사울은 말씀을 전하기에 꽤 재능을 가진 사람으로 보인다. 이제 거듭났지만 사도들과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였다.
“그래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지내며 자유롭게 예루살렘을 드나들면서 주님의 이름을 담대하게 전하였다.” 사도행전 9:28 KLB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재림을 목격한 사람들이고 예수님을 근처에서 모시며 배움을 얻은 사람들인데 이제 막 거듭난 사울이 사도들과 함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사울이 꽤나 명석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여러 언어도 구사할 수 있어 언어의 재능을 전도에 활용하고 있음을 기록하고 있기도 하다.
“사울은 그리스 말을 하는 유대인들과 이야기도 하고 논쟁도 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몄다.” 사도행전 9:29 KLB
9장 말미, 베드로의 기적에 대해 또 다시 기록하고 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내내 기적을 전도의 수단으로 확실히 이용하고 있다.
“베드로는 그 여자의 손을 잡아 일으켜 세우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 그녀가 살아난 것을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 소문이 온 욥바에 퍼져서 많은 사람이 주님을 믿었다.” 사도행전 9:41-42 KLB 가만히 보면 베드로의 본래 직업은 어부였다. 성실하지만 물고기를 어디에서 잘 잡을 수 있는지 빠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즉 성실하지만 두뇌회전이 빠르지 않는 사람이었을 거라 본다. 만약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으면 로마군사가 예수님을 아냐고 했을 때, 그저 3번 부인하진 않았을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부인하지도 인정하지도 않는 말투로 돌려보내지 않았을까 한다.
하지만 하나님은 베드로를 있는 그대로 쓰신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베드로에게 기적의 능력을 주셨고 특유의 부지런함을 주셨다. 어러 지방을 두루 다니는가 하면 빌립이 사마리아에서 전도를 할 때 성령을 내리기 위해 먼길을 한아름에 달려왔다. 베드로는 정말 있는 모습 그대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전하기 위해 남은 생을 헌신했다.
사도행전 3장부터는 베드로와 요한이 전도여행 중 행한 많은 기적들과 사람들에게 전한 말씀을 기록하고 있다.
앉은뱅이를 일어나 걷게 하기도 하고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라!” 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러자 그는 곧 발과 발목에 힘을 얻어 벌떡 일어서더니 걷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그는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사도행전 3:6-8 KLB “또 예루살렘 부근 사람들도 많이 몰려왔는데 그들도 환자들과 더러운 귀신들에게 고통당하는 사람들을 데리고 와서 모두 고침을 받았다.” 사도행전 5:16 KLB
이런 기적은 효과적인 전도의 수단이 되었다.
“그래서 의회에서는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단단히 주의만 주고 놓아 주었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그 기적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기 때문이다.” 사도행전 4:21 KLB
4장 말미부터는 재물에 대해서도 기록되고 있다.
믿는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을 나누기도 했고,
“믿는 사람들은 모두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재산을 제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서로 나누어 썼다.” 사도행전 4:32 KLB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님을 속이고 재산의 일부만 나누다가 죽음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드로는 아나니아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어째서 당신은 마음에 사탄이 가득하여 성령님을 속이고 땅값의 일부를 감추었소?” 사도행전 5:3 KLB “그러자 즉시 그 여자도 베드로의 발 앞에 쓰러져 죽었다. 그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여자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녀의 남편 곁에 묻었다.” 사도행전 5:10 KLB 사도행전에서는 재물을 나누지 않음을 죄악시 여기는 듯 하다. 우리 시대에 이런 행위가 과연 가능할까? 재물을 얻었는데, 구원받고 재물을 구원받은 사람들과 나눠 쓴다. 가진 재물을 제대로 헌납하지 않는 사람들은 벌을 받는다.
우리가 큰 돈을 벌 수 있게된 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는 것은 쉽게 인정할 수 있으나 구원받은 후 재물을 모두 나누기는 쉽지가 않을 것 같다. 이 구절에서 재물을 너무 소중히 여기지 말라, 하나님만 바라봐라 라는 말로 순화 시킬 수 있겠지만 베드로와 사도들은 재물을 모두 나누는 것이 하나님 앞에 바람직한 일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분명하다.
5장에서, 사도들은 다시 잡혀 감옥으로 가게된다.
“의회는 가말리엘이 권하는 말을 받아들여 사도들을 불러다가 매질한 후에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 말라고 명령하고 그들을 놓아 주었다.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욕당할 만큼 가치 있는 자로 여김을 받게 된 것을 기뻐하며 의회에서 나왔다.” 사도행전 5:40-41 KLB
이번에 사도들은 율박학자이자 의회 의원인 가말리엘의 제언에 의해 사도들은 풀려나게 되나, 대신 매질을 당한 후 더 이상 전도하지 말 것을 강요를 받고 풀려나게 된다. 이런 곤란에도 사도들은 예수님을 위해 모욕당할 만큼 가치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음을 기뻐하며 더욱 더 전한다. 최소한 사도들은 예수님이 죽음과 부활을 직접 목격하였기에 어떤 환란이 와도 그것을 기쁨과 즐거움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6장에서, 사도들은 전도를 도와 줄 일곱 사람을 뽑는다.
“그래서 열두 사도들이 모든 신자들을 불러모으고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가 구제하느라고 하나님의 말씀 전하는 일을 소홀히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사도행전 6:2 KLB
사람의 관심을 불러모으기 위해 기적을 많이 행하였던터라 하나님 말씀 전하는 것이 소홀해 졌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일곱명을 뽑은 후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하는 일에만 힘쓰도록 하자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기도하고 말씀 전하는 일에만 힘쓰도록 합시다.” 사도행전 6:4 KLB
여기서 뽑힌 7명의 사람 중 하나가 처음으로 순교한 유명한 스데반 집사다.
“모든 신자들은 이 제안을 기쁘게 여기고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뽑아” 사도행전 6:5 KLB
이제 일곱명의 집사와 사도들의 노력으로 예루살렘에 믿는 사람 수가 크게 늘어났고, 심지어 제사장들까지도 서서히 믿는 사람이 생겨 났다.
스데반은 기적 중심으로 전도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충만한 스데반이 사람들 가운데서 굉장한 기적과 놀라운 일을 많이 행하였다.” 사도행전 6:8 KLB
기적 —> 사람의 관심 —> 말씀 —> 깨닫음 —> 구원 이러한 단계에서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가장 좋은 것은 기적이랴. 스데반은 대쪽같은 사람으로 타협과는 조금 거리가 먼 사람이었을 것 같다. 듣는 사람이 듣기 좋게 순화해서 말씀을 전할 수도 있지만 스데반은 그렇지 않고 직설적으로 유대인이 잘 못하고 있는 것을 이방인에 비유하며 지적했고, 율법을 지키지 않음을 지적했다.
“고집을 피우며 이방인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사람들이여, 여러분도 조상들처럼 성령님을 계속 거역하고 있습니다.” 사도행전 7:51 KLB
스데반의 직설적인 말은 대제사장들에게 심히 모욕적으로 들렸을 것이며 얼마나 화가 났는지를 성경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스데반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 끝까지 치밀어 올라 이를 갈았다. 사도행전 7:54 그러자 그들은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일제히 스데반에게 달려들어” 사도행전 7:57 KLB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부활하고 다시 하늘나라로 승천한 후 제자들과 성도들의 모습을 설명하고 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셨다가 다시 부활하시고 하늘나라로 승천하는 엄청난 사건은 아주 짧은 기간에 이뤄졌다. 제자들은 그 동안 믿고 따르던 예수님이 갑작스럽게 사라진 것이기 때문에 그 후 어떻게 해야할지를 몰랐을 것 같다. 인간적으로 상실감이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고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되기도 했을 것이다.
이때 제자들이 다음으로 한 행동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들은 거기 모인 여자들과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와 예수님의 동생들과 함께 한마음으로 계속 기도에만 힘썼다.” 사도행전 1:14 KLB
제자들은 마음을 진정시키고 한마음올 기도에만 힘썼다.
“These all continued with one accord in prayer and supplication, with the women, and Mary the mother of Jesus, and with his brethren.” Acts 1:14 KJV
킹제임스 성경에서 영어 원문을 찾아보면 One accord in prayer and supplication이라는 표현을 쓴다. 기도와 간구로 One accord 하나의 마음으로 계속되었다고 한다.
제자들은 모여서 회의하거나 의견을 나눈 것이 아니라 한마음올 기도와 간구를 했다고 한다. 아마 인간적으로 도저히 자기들의 앞날을 계획할 수 없었지 않을까? 기도 외에 할 수 있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들의 전도여행이 시작되었다.
사도행전 2장에서는 방언의 은사를 받은 제자들이 묘사된다. 방언이라하면 일부 교회에서는 하늘나라말 또는 천사들이 쓰는 말이라고 가르치기도 하나 최소한 사도행전에서는 방언은 곧 외국어 이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능력으로 그들도 알지 못하는 외국어로 말하기 시작하였다.” 사도행전 2:4 KLB
전도를 하기 위해 외국어 사용능력이 필요했고 제자들은 모두 갈릴리 사람들이었기 떄문에 외국어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은 이를 아시고 방언을 제자들에게 선물어하여 외국어로 외국인들에게 기쁜소식을 전하게 함께 동시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증거하게 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잔뜩 술에 취했군!” 하며 제자들을 조롱하였다.” 사도행전 2:13 KLB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제자들의 방언하는 모습을 보고 술 취했다라고 조롱했다고 한다. 성경이 참 디테일하다는 것이 느껴지는게 가끔 우리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외국어를 하면 술취해 횡성수설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이러한 느낌을 누군가 느꼈고 성경에서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제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을 전파했는지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어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기적과 놀라운일을 베푸시며 자신을 증거했다. 그리고 조상 다윗이 말한것 처럼 죽어서 묻혔고, 다시 부활했으며 자기가 다 보았다고 설명한다. 베드로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시 베드로에게 질문한다. 마치 너가 하는 말 모두 알겠고 이해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해? 라고 묻는 것이다. 2000년 전 사람이나 현재의 사람이나 사고의 순서는 크게 다르지 않는 듯 하다. 너무 당연한 질문이고 성경은 이런 디테일함까지 기록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형제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겠소?” 하였다.”. 사도행전 2:37 KLB
그리고 베드로가 대답한다.
“그래서 베드로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여러분, 모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 이 약속은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들과 주 우리 하나님이 부르실 멀리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하신 것입니다.” 이 밖에도 베드로는 많은 말로 증거하며 그들에게 이 타락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고 권하였다.” 사도행전 2:38-40 KLB
베드로는 구원을 받기 위해 해야할 행동을 정확하게 답변하고 있다. 회개하라, 그리고 세례를 받아 죄 사함을 받아라. 그럼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
무엇을 회개하라는 것인가?
사도행전 2장 23절에서는 우리가 예수님을 찔러 죽였음을 설명하고
“이 예수님은 하나님이 미리 아시고 정하신 계획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졌는데 여러분이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려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사도행전 2:23 KLB
사도행전 2장 27절에서는 사람들이 모든 설명을 듣고 마음이 찔려했다고 표현하고 있다. 즉, 여기에서 회개는 우리가 악한 사람들의 손을 빌려 예수님을 못 박아 죽게했음을 인정하고 회개하라는 것으로 이해 해야한다. 그럼, 예수님을 우리 손으로 죽였음에 죄책감을 가지고 회개하고 물로 세례를 받으면 성령이 우리에게 임해서 구원을 받는 것인가? 잘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긴 하지만 최소한 사도행전에서의 베드로 설명에 의하면 그렇다.
여하튼 방언이라는 기적과 그 외 기쁜소식으로 전해진 놀라운 소식으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고 하나님께서는 구원받는 사람들이 날마다 많아지게 하셨다.
재미있는 표현 중하나는 2장 마지막 구절이다.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리고 주님께서도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많아지게 하셨다.” 사도행전 2:47 KLB
여기서 구원받는 사람들이 많아 졌다가 아니라, 주님께서 많아지게 하셨다고 한다. 표현이 일반적인 생각과 맞지 않아 킹제임스 성경을 다시 찾아봤으며 영문에서는 “The Load Added”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praising God, and having favour with all the people. And the Lord added to the church daily such as should be saved.” Acts 2:47 KJV
구원이 우리의 전도를 위한 노력으로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ADD or 더 해주시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자신의 겸손과 더불어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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