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정부는 부동산에서 만큼은 계속 헛발질을 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2.4 대책까지 총 25번의 대책을 내놨음에도 부동산 가격은 계속 올라간다.
7년간 이어지고 있는 부동산 상승. 아무거나 사도 다오르는 시기에 살고 있다.
정부의 헛발질은 덤이다.
기존 30대 후반 40대는 영끌을 하던, 지난 7년간 구축을 샀었거나, 갭투, 청약 등 최소한 기회라도 있었으나 새로 결혼해서 집을 구하는 세대들은 어나더레벨로 가버린 집값은 진즉 포기했고 전세라도 구해야되는데, 이젠 전월세 갱신 청구와 신규아파트 전월세 금지로 영향으로 전세값 역시 어나더레벨로 가고 있는 중이다.
대한민국에서는 일찍 태어난게 복 받은거다.
제가 결혼할 때, 광교 30평 전세가 1.5억, 목동 20평 전세가 2억이었다. 대기업 맞벌이라면 사회 진입해서 모은돈과 부족한 부분은 전세대출 받으면 집은 구할 수 있었는데 (물론 그때도 미친 전세값이라고 했다)
일단 주력 종목인 제습기, 공기청정기는 소모성 제품이 아니라 한번사면 최소 5 ~ 7년은 사용한다고 봐야한다.
혼자 자취하던 시절 반지하방 특유의 눅눅함을 제거하기 위해 구매한 위닉스 제습기를 10년이 지난 아직까지도 문제없이 잘 사용하고 있다. 물론 요즈음 나온 제품 디자인이 좋긴하지만 사용상 하등의 문제가 없다. 공기청정기 역시 6년 전 구매한 제품에서 필터만 바꿔주고 있고 교체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한다.
즉, 미국산불로 인해 증가하는 공기청정기의 관심과 판매량은 일시적인 이벤트성 매출로 봤다.
Winix에 대한 관심도는 9월에 폭증하다가 연말까지는 어느정도 관심도가 유지되었지만 21년 부터는 활실히 줄어드는 추세다.
밸류 또한 부담되었다. 위닉스 과거 밸류를 봤을 때, 2019년 1분기에 가장 좋은 밸류를 받았다.
PER 약 20, PBR 약 3.5정도, 하지만 당시 ROE는 25% 이상이었고 거기다가 정부에서 전국학교에 공기청정기를 지원하겠다는 이슈도 있었다. 물론 PBR 벤드가 우상향하면 성장주로 봐야하는 경향이 있으나, 4분기 실적이 나온다고 하더라도 19년 1분기 밸류는 넘을 수 없을 거라고 봤다.
아마 추가로 더 상승한다면 3만원까지 내다볼 수 있겠으나 어차피 장기로 가져갈 종목은 아니었기에 미련없이 매도했다.
한 주중 꽤 많은 시간을 교회생활에 할애했기에 왜 교회에 이렇게 시간을 보내야 하는가, 내가 믿고 있는 것들이 사실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적이 있었다.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면 이러한 노력들은 의미 없는 무용한 것들이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지금 돌아보면 꽤 기특한 청소년이었다. 중학생때 반에서 성경공부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수업 끝나고 주 2회 모여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했다. 함께하고 싶었다. 어떻게 같이 성경 공부할 수 있는지 친구에게 물으니 지도하시는 선생님께 말씀드려 본다고 대답했다. 나름순종적인생긴 얼굴을 하고 있어서인지 선생님은나를 만나보고흔쾌히 승낙하셨다. 이렇게 4명이서매주 화, 목 학교 구석에 있는 조그마한 과학실 같은 곳에서 성경공부를 시작했다. 성경 말씀은학교 밖 전도사님이오셔서 말씀을전하셨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고, 예수님이 오심을 구약에서 계속 예언하고 있으며, 마침내이 땅에 오셔서 우리 죄 때문에 돌아가셨음을 차근차근 배웠다. 그동안 교회에서 설교말씀을 통해 부분적으로 배우던 성경을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배워내용들이 머리속에서 구조화되는 느낌이었다. 재미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말씀을 전하던 전도사님은 "다락방"이라는 교단에서 오신 분이셨다. 학교 선생님 역시다락방 교인이셨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다락방은 이단이니 조심하라고말씀하셨다. 왜 이단인지 물었더니 어머니께서는
처음은 좋은데 결국 다락방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가르쳐!
라며, 처음에는 모여서 성경공부 하는 모임으로 시작하지만 결국 다락방만으로 천국으로 갈 수 있다고 가르친다는 것이이단이라는 이유였다. 당시 인터넷을 통해 검색해볼 수 있는것도 아니었고 부모님의 말씀이 절대선(善)이라고 믿었던 시절이었기때문에 같이 공부는 하되 다락방 교회만은 절대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럼에도 불구매주 일정시간 친구들과 모여 성경공부를 함께 할 수 있는 자체가 즐거웠다. 공부 뿐만 아니라 신앙서적도 서로 돌려 읽었다. 당시기독교 서적이라는 것을 읽어 본적도 없거나 와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되었다. 말씀 전하시는 전도사님도 중학생들이 열의를 갖고 성경공부를 하니 매주 오시는 길이 즐겁다고 하셨다. 전도사님은 기독교의 핵심교리로 인간이 하나님께 끊어진 관계를 예수님의 죽음으로 다시 이어 주셨으며, 이러한 예수님을 "영접"해야함을 가르쳤다. 영접. 예수님이 내 죄로 돌아가심을 믿고 영접하는 것. 교회생활을 하며 처음 듣는 단어였지만 이내 이 단어가 핵심이라는 것을 깨우쳤다. 개안했다고 표현할 정도로 새로운 세상을 본 느낌이었다. 교회에서 매주 듣는 말씀이 시시하게 느껴졌다. 말씀 시간 중 딴짓 하는 친구들을 보면 한심하게 느껴지고, 다락방을 통해 체계적으로 말씀을 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말씀을 전하시던 전도사님이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바빠 지셨다. 서울 다녀왔다는 얘기를 자주하셨다. 전도사님께서는 드러머셨다. 자신이 드럼연주를 한 CCM 음반을 들어보라며 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 다른 사역을 위해 떠나신다며 작별인사를 하셨다. 전도사님 이후 선생님께서 말씀을 전해 주셨다. 30대 초반 정도되는 여 선생님이셨는데, 신앙적으로 우리가 잘 성장하기를 항상 기도해 주셨다. 전도사님에 비해 말씀 전하는 것은 서툴었지만 선생님의 따뜻한 마음이 느껴져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전도사님이 가신 후 사실 말씀을 전하기 보다 우린 학교생활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어떻게 신앙적으로 해결할지에 대해 서로 토의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리고, 중학교 2학년을 마치는 봄방학 때였다. 선생님마저 다른 학교로 전근 가신다며 작별인사를 하셨다. 아쉬웠지만 당시 사춘기 청소년이었고 표현이 서툴러서 아쉬운 마음을 표현할 줄 몰랐다. 그저 담담히 '안녕히 가세요'라며 인사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나의 신앙생활에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하신 분이셨는데 지금은 성함도 기억나지 않아 찾아볼 수 도 없다. 그냥 그렇게 잊혀졌다.
성경공부를 더 이상 하지 않지만 이때 성경공부는 평생 신앙생활의 자양분이 되었다. 성경을 공부하며 기독교서적 뿐만 아니라 CCM도 열심히 들었다. 김명식, 소리엘, 예수전도단과 같은 CCM가수들의 음반테이프를 사서 테이프가 늘어날 때까지 들었다. 일반 대중가수들보다 CCM 노래가 더 좋았다. 자연스럽게 교회에서 CCM을 따라 부르고 교회친구들과 함께 불렀다. 가사가 좋기도 했지만 친구들과 악기를 연주하며 함께 노래 부르는 것이 즐거웠다. 찬양을 통해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친구들과 함께 찬양하는 것도 즐거운데, 하나님과더 가까워진다고 느끼니 일석이조였다. 되돌아보면 그때 아름다운 추억들이 많았다. 청소년기 즐거운 추억들은 모두 교회에서의 기억이었다. 그때 친구들이 그립다. 아직 연락이 닿는 친구도 있어 당시 함께 찬양했던 얘기들을 하 곤한다. 아마 그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평생 같은 주제로 얘기할 것이다.
그렇게 뜨겁던 청소년기신앙생활은대학을 가며 급속히 식었다. 세상은 재미있었고 술과 친구들은 삶의 양념과 같은 존재들이었다. 신앙의 뿌리가 약했기 때문에 금방 뜨거워진 반면 금방 식었다. 하나님을 향한 마음은 뜨거웠지만 현실은현실이었다. 이맘때쯤 아버지의 외도로 부모님의 관계가 악화되었고 아무리 울며 기도해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금방 기도를 들어 주실 것 같았던 하나님이었지만 진로며, 가족이며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현실은 변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깨닫으니교회생활을 더 이상 열심하 할 이유가 없었다. 그냥 시간 날 때 마다 가는 곳이 되었다. 주일마저 교회가지 않으면 마치 죄를짓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을 정도로만 갔다. 종교는 기독교였지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하나님을 믿는 사실을 믿는 약간의 고집같은 것이 있었다. 누가 물어보면 기독교라고 떳떳이 얘기했지만일종의 고집처럼기독교라고 답했다.
부모님은교회 생활에 아주 열심이었다. 이러한 부모님에 따라 자연스럽게 기독교라는 종교를 가지고 태어났고 어렸을 때부터 교회학교에서 자랐다. 이를흔히 모태신앙이라고 부른다. 목사님과 전도사님, 어른들은 교회생활에 항상 열심히 해야 한다고 했다. 나름 순종적인 편인 나는, 무엇을 열심히 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일단 어른들이 시키는 일들, 목사님, 전도사님이 설교하며 가르쳐준 교리를 지키려고 부단히도 노력했다. 물론 전도도 열심히 했다. 교회학교에 친구들을 데려 오면 달란트를 준다는 말에 동네의 거의 모든형, 친구, 동생들을 교회에 데려왔다. 그리고 많은 달란트를 받아 1년에 1~2번 있는 천국잔치에달란트로 살수 있는 가장 좋은 물건들을 살 수 있었다. 교회 봉사도 열심하 했다. 학생부 성가대, 학생부 임원, 찬양인도, 매년 수련회도 따라가며 어디인지도 모르는 어느 산기슭에서 몇시간이고 앉아 설교말씀 듣고 지은죄를 회개하고 가족들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열심히 하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고, 모든 것이 잘 풀릴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죽어서 천국에서 사랑하는 아빠, 엄마, 형과 함께 행복하게 살고 싶었다.
중학교 때, 다른 교회 학생부들과 함께하는 연합집회에 참여했다. 강사는 서울의 어느 유명한 목사님 이셨다. 기도를 너무 많이 하셔서 목소리는 쇠가 갈린 목소리였고 그런 목소리를 가진 목사님을 교인들이 존경의 눈빛으로 봤다. 설교 중 목사님이 특정 여학생을 일으켜 세웠다. 담임하는 교회의 청년이었다. 목사님은 말씀하셨다. "이 친구는 하나님께서 복을 많이 주시고, 크게 쓰임을 받을 것이다. 왜냐하면이 친구 아버지가 MBC 카메라 총감독이라 교회 모든 영상작업을 총괄하여봉사해주시고이 친구는 서울대 법대를 가셨어. 사실 서울대 법대를 간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고3 공부할 때도 그렇고 법대생이라서 바쁠 텐데 교회봉사를 불평없이 꾸준히 열심히 해. 하나님이 분명 크게 쓰실 거시단 말이지" 라고 확신에 차서 말씀하셨다. 충격이었다. 난 나름 교회에 열심히봉사한다고 했는데, 나의 봉사 방법이 잘 못된 것인가 의심을 해보았다. 아님 마음 가짐의 문제인 것 같기도 했다. 가끔 교회 갈 때는 귀찮았다. 예배시간에 졸기도 하고 친구들과 장난치기도 했던 것이 떠올랐다. 부끄러웠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 그전보다 조금 더 열심히 했다. 그렇게 학생시절의 교회생활은 끝나갔다. 물론, 성적의 변화는 없었다. 아니딱 노력한 만큼만 나왔다. 하나님이 나를 다른 쪽으로 쓰시려는 구나 하며 스스로를 위로 했다. 지나고나서 생각해보면, 서울대 법대에 간 그 여학생은 MBC에 입사하여총카메라 감독을 할 정도의 우수한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러 받아, 정보의 중심인 서울에서 (아마 여의도 인근 거주 했으리랴) 월급쟁이로서는 고연봉의 아버지의 서포트를 받으면서 공부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공부분야에서는 다소 우수하지 않는 유전자와외벌이 군무원 자식으로 박봉에학원조차 마음대로 다니지 못했으며,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동기부여는 있었으나 의지가 박약했다. 그래도 나름 선방하긴 했으나서울 법대에 간 여학생과 나의 차이는 신앙생활의 열심정도가 아니라 이러한신앙 외적인 차이 때문이라는 건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난 후 알게 되었다.